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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썬데이 루틴

버지니아 울프의 썬데이 루틴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어쨌든 쓴다

5min
버지니아 울프의 썬데이 루틴
☀️
SUNDAY ROUTINE 여성 역사의 달, 위대한 여성의 이야기. 버지니아 울프일요일 일정을 확인하고 함께 경험해보세요.

작가에게 가장 완벽한 하루는 무슨 모습일까요?

1920년대 어느 일요일, 영국 런던 근교 서식스의 별장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혁명적인 작품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그가 영감을 얻기 위해 어떻게 고군분투했는지, 글을 쓰면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런던을 산책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아봅시다.

🛁
8 : 00 소설가를 위한 목욕법

오전 8시, 고요하고 찬 공기 속에서 눈을 뜹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살짝 떨리는 기분을 안고 하루를 시작해요. 맑고 깊은 물이 가득한 주전자를 들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조심조심 발을 옮기죠. 하지만 이내 누군가와 마주치고, 물은 와르르 쏟아지고 말테죠.

아침에 꼭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목욕입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몸을 담그면 밤사이 제 주위를 유령처럼 맴돌던 온갖 생각들이 저를 사로잡아요. 그러면 저는 질문을 하고, 대답도 합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루이가 이 대화를 엿듣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는 제가 목욕을 할 때 세 사람이 더 들어있는 것 같다고도 했죠. 오늘 제가 욕실에 초대한 손님은 댈러웨이 부인입니다. ‘부인, 오늘 하루는 어떻게 시작하실 건가요?’ ‘우선…제가 직접 꽃을 사러 갈 거예요!’

이게 무슨 대단한 비밀은 아니지만, 창작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꼭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요. 우리는 가능한 한 계속해서 몽상에 빠지고 최대한 오래 무의식의 상태를 유지해야 해요.

✍️
10 : 00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어쨌든 쓴다

오전 10시, 남편 레너드와 함께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한 다음,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여성이 작가가 되려면 연간 500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6000만 원)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죠. 저는 운 좋게도 두 가지를 다 갖추고 있어요. 먼 친척의유산을 상속받게 되면서 서식스의 별장, 몽크스 하우스를 구매했고 꽤 멋진 집필실을 꾸몄죠. 커다란 창 너머로 정원이 내다보이는 아늑한 공간이에요. 여기서 문을 걸어 잠그고 온전히 혼자가 되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극히 조용하고 규칙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해요. 일요일에도 별일이 없다면 묵묵히 작가의 일을 이어갑니다. 매일 같은 시간이 일어나,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같은 시간에 글을 쓰고, 같은 얼굴을 보고, 같은 책을 읽기를 원해요. 최면에 걸린 것 같은 상태로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책상에 앉아있는 저를 상상해보세요. 아마도 지금쯤 런던의 다른 여성들은 대부분 집안의 천사가 되어 방을 닦고 쓸거나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그들과 달리 저는 집안의 천사를 없애버리고 말았어요. 목덜미를 잡아채고 최선을 다해 죽여버렸죠. 법정에 가도 정당방위라고 말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그 천사가 제 글의 핵심을 훔쳐 갔을 테니까요.

자, 이제 엉망으로 뒤엉킨 책상에서 보라색 잉크펜을 찾아 손에 쥐어요. 3주 안에 완성해야 하는 원고가 100페이지입니다. 운이 나쁘면 성 베드로 성당의 종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집중이 깨져버릴 수도 있어요. 밖에서 폭격이 벌어지는데도 신비로운 몰입에 사로잡혀 홀린듯 글을 써내려간 날도 있지만요. 이 직업에도 좋은 날이 있고 나쁜 날도 있어요. 어쨌든 써야만 해요.

13 : 00 오후의 티타임

오후 1시, 점심시간입니다. 온전히 집중하다보면 입에 무언갈 넣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곤 해요. 하지만 손님이 온다면 강제로라도 하던 일을 멈추게 되죠.

오늘은 헤롤드 니콜슨 경이 찾아왔습니다.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성에 사는 외교관이예요. 괜찮은 친구지만 전 그 아내를 훨씬 더 좋아해요. 비타를 향한 제 마음은 헤롤드보다 훨씬 더 깊고 열렬한데, 왜 우리는 함께 살지 못하는 걸까요? 헤롤드에게도 오래 사귄 남자 애인이 있다는 건 비밀이 아니죠. 저와 레너드처럼 헤롤드와 비타도 부부라는 사회적 역할을 함께 수행하는 동료라고 할 수 있어요.

기이한 동지애를 공유하는 세 사람이 정원에서 둘러앉아 함께 차를 마십니다. 저보다는 손님 대접에 익숙한 레너드가 이탈리아 만토바 여행에서 사온 그릇들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놨어요.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노파에게 강매를 당했는데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어요. 비타가 보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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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00 런던을 산책하는 즐거움

오후 4시, 손님이 찾아오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이지만 역시 최고의 순간은 그들을 다시 집에 보낼 때예요. 손님이 나가자마자 외출 준비를 합니다. “아무래도 정말 연필을 사야겠어” 선언하듯 소리치면서 외투를 챙겨요. 저만큼 강렬하게 연필을 원했던 사람은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런던을 산책하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시간은 오후가 되어야 하고, 계절은 겨울이어야합니다. 익숙한 집의 문을 열고 나오세요. 비로소 친구들이 알고있는 자아를 벗어던질 수 있어요. 원하지 않는 기억을 떠올리도록 요구하는 집안의 물건들로부터 떠날 수 있어요. 문이 닫히면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죠. 오로지 두 개의 눈만 남아 아름다운 런던의 거리를 맘껏 품을 수 있어요.

스트랜드 거리에 있는 헌책방으로 향합시다. 디킨스도 좋아하는 곳이예요. 골목의 코너를 돌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생각과 망상들을 즐겨보세요. 눈 닿는 곳곳에 상상의 집을 세우고 마음껏 방 안을 꾸며봐요 워털루 다리를 건너 영영 먼 곳으로 떠날 수도 있어요. 맹인이 되었다가, 거리의 가수가 되고, 세탁부가 되는 환상에 빠지는 동안 모험을 계속될 거예요.

길을 잃지 않으려면 언제나 연필과 같은 핑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나왔더라? 싶을 때쯤 헌책방에 도착해요. 연필을 사갖고 나와 되돌아갑니다. 어느새 다시 익숙한 문 앞이죠. 문을 열면, 모든 것이 그대로예요. 저는 이 도시에 찬란한 보물들을 모두 보았지만 겨우 연필만 챙겨왔어요.

📮
21 : 00 연애편지를 쓰는 시간

오후 9시,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홀로 방에 남아요. 훌륭한 작가들이 어떻게 밤에 글을 썼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해봤지만 폭삭 늙는 기분만 들었죠. 저녁에 하기 좋은 일은 따로 있어요.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 거예요. 낮에는 강물 밑에 감춰두어야만 했던 마음을 몰래 꺼내봅니다.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 반복했던 문장을 기어이 완성하고 잠에 들어요. 내일 또 다시 같은 하루를 반복하기를 기대하면서.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난 당신을 좋아해요. 이보다 더 강한 말이 나올까봐 두려워요. - 비타에게, 버지니아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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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따라하고 싶은 버지니아 울프의 썬데이 루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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