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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의 역사

미투 운동의 역사

2007년부터 시작된 미투 운동의 역사

4min
미투 운동의 역사

목적

2017년 10월, 유명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Harvey Weinstein)’의 성범죄 파문은 미국 전역을 넘어 전 세계를 흔들어 놨다. 영화계에서의 자신의 명성과 권력을 이용해 수많은 여성을 상대로 성범죄를 벌인 하비 와인스틴에 대한 용감한 폭로는 미투 운동에 불이 붙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2017년 이전에 이미 미투 운동은 존재했다. 미투 운동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미투 운동이 세상을 뒤흔들 때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미투 운동의 시초와 전개 과정

미투 운동의 창시자 ‘타라나 버크’

타라나 버크(Tarana Burke)는 1973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운동가였으며 지역 사회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10대 때부터 이미 그녀는 주택 불평등, 인종 차별, 경제적 불의와 같은 문제를 고치고자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1980년대 후반에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을 위해 ‘21st Century’라는 단체에 가입했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에도 21st Century에서 활동했는데, 그때 그녀는 성폭력과 학대에서 살아남은 많은 유색 인종 여성들을 만났다. 타라나 또한 한 명의 성폭행 피해자였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을 돕기로 했다.

2007년, 그녀는 유색 인종 미성년 여성들을 위해 Just Be Inc라는 비영리 조직을 설립했다. Just Be Inc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그녀가 살던 앨라배마주 셀마의 모든 공립학교에 채택될 정도로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Me Too’ 운동이 탄생했다. 유색 인종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자 ‘공감을 통한 동기 부여’라는 목적을 강조하기 위해 ‘Me Too’라는 문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Me Too’ 운동은 유색 인종 여성들의 성범죄 피해 치료뿐만 아니라 그들이 공동체 속에서 다시 적응하고 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후에도 그녀는 계속 비영리 조직 활동을 이어갔다. 유색 인종 예술 단체의 전무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으며,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국립 투표권 박물관의 큐레이터 컨설턴트이자 연구소의 특별 프로젝트 디렉터이기도 했다. 또한, 1965년에 있었던 투표권 투쟁을 위해 셀마 행진을 계획한 마틴 루터 킹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Selma’에서 컨설팅 직책을 맡기도 했다.

그렇게 타라나 버크가 유색 인종과 여성 인권에 힘쓰던 도중 2017년,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 파문이 일면서 그녀의 #MeToo 운동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미투 운동을 재조명한 ‘앨리사 밀라노’

2017년 10월 8일, 뉴욕 타임스는 와인스틴 컴퍼니가 하비 와인스틴의 지속적인 성폭행 및 성추행 사실을 보고받자 그를 해고했다는 기사를 냈다. 누군가의 용기로 수십 년 동안 저질러 왔던 하비 와인스틴의 추악한 성범죄가 수면 위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수십 명의 영화 배우 및 관계자들이 자신도 하비 와인스틴에게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다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피해자들과 세상이 함께 분노하는 동안 미국의 배우이자 운동가인 ‘앨리사 밀라노(Alyssa Milano)’ 또한 하비 와인스틴에 대한 기사를 읽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친구이자 미국의 운동가 겸 작가인 ‘샬롯 클라이머(Charlotte Clymer)’가 그녀에게 제안했다.

2017년 10월 16일, 앨리사는 샬롯의 제안과 함께 “만약 당신이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면 이 트윗에 답글로 ‘me too’라고 적어주세요”라는 글을 게시했다. 그리고 곧장 잠이 들었는데, 앨리사의 이 짧은 트윗은 다음 날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돌아왔다.

앨리사의 트윗을 시작으로 하비 와인스틴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업계에서, 일상에서 성희롱과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이 #MeToo 해시 태그를 달고 자신의 이야기를 SNS에 공유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폭발적인 반응이었는지 페이스북에서는 처음 24시간 동안 1,200만 개 이상의 게시물과 이에 대한 반응이 공유됐을 정도였다. 영화계로 한정되어있던 분노가 제방을 넘어 전 세계 모든 이의 삶으로 번졌다.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두 개의 출발선, 하나의 목적지

앨리사 밀라노의 ‘me too’ 언급 이전인 2017년 10월 12일에 미국의 배우 ‘로즈 맥고언(Rose McGowan)’이 하비 와인스틴에 관한 게시글을 올렸다가 계정을 정지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트위터 관계자는 ‘그녀의 게시글 중 하나에 개인 전화번호가 포함되어 있어 서비스 약관을 위반했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내놓았지만, 개별 게시글을 삭제하는 대신 계정을 정지시킨 것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사람들은 부조리에 분노하며 그 다음 날인 10월 13일에 #WomenBoycottTwitter 해시 태그를 달고 트위터 보이콧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흑인, 라틴계 및 다른 유색 인종 여성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WOCAffirmation (유색 인종 여성이라는 뜻의 Women Of Color의 약자)이라는 자체 캠페인을 시작했다. 유색 인종 여성과 백인 여성이 학대를 신고했을 때 대우받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백인 여성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며, 유색 인종 여성의 학대는 당연시 여겨진다며 성범죄 내에서 인종 차별적 의미를 강조했다. 그래서 처음 앨리사가 #MeToo운동을 시작했을 때 유색 인종 여성들은 ‘또다시 유색 인종 여성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지워진다’며 반발했다.

앨리사는 사실 백인 여성으로 과거 선행되었던 타라나의 미투 운동을 몰랐기 때문에 ‘me too’ 게시글을 올리고 이틀이 지난 뒤 타라나에게 연락했고 함께 연대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전했다. 타라나는 처음엔 자신의 운동이 원래의 의미가 퇴색하고 의도치 않은 목적으로 사용될까 두려웠지만 이내 마음을 바꿨다. 초기의 목적과 계기는 달랐지만 결국 그들이 공통으로 원하는 것은 페미니즘과 여성의 안위라는 동일한 목표였다.

타라나 버크는 “내가 미투 운동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소유하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다. 나와 앨리사 두 사람에게 집중돼서는 안된다. 미투 운동은 성범죄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라며 앨리사의 연대 요청을 받아들였다.

앨리사는 타라나와의 대화 끝에 미국의 토크쇼 ‘Good Morning America’에 출연해 자신의 미투 운동이 타라나의 것과 같은 운동이라는 것을 공표했다. 두 운동은 인종의 차이와 갈등을 넘어서 교차점을 맞이해 마침내 하나의 강력한 물결이 됐다.

요약

  • 미투 운동은 유색 인종 여성들을 위해 2007년 타라나 버크가 처음으로 고안했다
  • 2017년 앨리사 밀라노가 영화계의 하비 와인스틴 사건을 모든 업계로 넓히면서 미투 운동을 재조명했다
전문가의 조언
우리에겐 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미투 운동의 창시자, 타라나 버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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